그럭저럭 푹 자고 서둘러 숙소에서 나왔다.
2일이나 있는건 세연씨와 나뿐이다.
모두가 숙소의 시설에 경악하며 나갔고 세연씨도 이 숙소에 불만을 토하는 나와 의견을 같이 하게 되었다.
에효...정말 우울했다.
여튼- 화창한 날씨 속에 조금 일찍 남역에 도착했다.
5시간 동안 기차 안에 있어야 해서 점심 꺼리를 샀는데 요거트용 스푼 조차 돈을 받더라.
스위스에선 알아서 챙겨주던데... .
다행히 하나 남은 스푼이 있어서 안샀지만 끝까지 틱틱거리며 기분상하게 하는 오스트리아가 싫었다.
으...음악만 좋은건가.
어째 한 나라 건너서 하나씩 안좋은지, 이거 징크스 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독일 안좋으면 안되는데... .
곧 출발한다고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이번엔 체코다.
부디 체코에선 절약할 수 있기를!
 

아싸~여권에 도장 찍었다!
히드로 공항 외엔 기차로만 이동해서 한 번도 도장을 못찍었는데 이번에 찍다니!!
역시 징크스대로 체코는 멋진 나라로 다가오는가!!

국경을 넘어서면서 보이는 체코는 상당히 친숙한 모습이다.
나무와 숲과 바위는 한국과 같은 모습인데다 시골 집집마다 텃밭을 가꾸는 모습도 정겹다.
프라하와 가까워지면서는 이제까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독일과 러시아의 색을 가진 유럽이랄까.
곳곳에 세계대전의 흔적으로 보이는 쓰러져가는 건물이 있었고 아파트나 주택의 모양도 누추하다.
수많은 전쟁을 겪어서인가.
이제는 지치고 기운이 없어보인다.
그러나 마냥 처진 모습이 아니라 상처를 남긴 채 안정을 되찾은 조용한 모습이다.
이런 느낌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낯익고 애처롭고 평온해보인다.

체코 프라하역에 내리자 호객꾼이 가득하다.
우리는 어느 호텔을 소개시켜주는 호객꾼과의 흥정으로 1박 45유로(67,000원)=1200코루나에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유스 호스텔이나 민박이 보통 도미토리 1박에 20유로*2인=40유로(6만원)인데, 더블 침대에 욕실이 딸린 방에 둘이서 45유로면 겨우 5유로 차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숙소 때문에 너무 고생한지라 5유로 더 쓰고 호텔에 머물면서 밥값을 아끼기로 했다.
뭐 어찌됐든 만족스러운 계약이었다.
호객꾼이 무상으로 호텔까지 태워준대다 객실을 확인하니 기대 이상으로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비수기라 싸게 받는듯 했는데, 좀 더 흥정하면 더 싸게 계약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전망 좋고 깨끗한 호텔에 만족하며 일단 코루나가 없어서 여권을 맡기로 환전을 위해 나왔다.
해진 후라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상당히 예쁘고 작은 프라하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것도 잠시- 테스트겸 10유로를 환전했더니 겨우 231코루나 주더라.
KFC에서 저녁 먹으니 17코루나가 남았다.
뭐지? 여긴 어디?
이 어처구니 없는 결과는 뭐냐!!!
세연씨가 우크라이나에서 지냈을 때도 환전소를 잘못 고르면 남아나는게 없다고 했는데 정말 동유럽은 다 그런가보다.
뭐든지 다 흥정이 되고 환전 금액도 제각각이고... .
생각도 못한 큰 지출에 속이 쓰리지만 내일을 위해 참기로 했다. 흑.
내일부턴 제대로 확인하고 살아야지.
체코에서의 첫날이 이렇게 어리버리하게 지나간다.
 
작성자 : toytreesp
작성일 : 20050908

2005/09/08 23:26 2005/09/08 23:26

Trackback Address >> http://wedding.makeself.net/trackback/384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참고 : 벨베데레 궁 (Belvedere : 김선겸 저, EUROPE IN MY POCKET 발췌)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궁전으로 17세기 후반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빈을 구한 오이겐 공의 여즘 별궁으로 쓰이던 곳이다. 상궁과 하궁으로 나뉘어 있는 궁전은 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유가 되었고,
1914년 사라예보에서 살해되어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던 오스트리아 왕자 페르디난트가 거주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상궁은 주로 19~20세기의 회화를 전시하고 있는데 클림트의 '키스'와 '유디트'는 꼭 보도록 하자.
이밖에도 상궁에는 쉴레의 작품을 비롯해서 오스트리아 회화, 로댕과 크노프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하궁은 원래 오이겐 공의 별궁으로 사용되던 것으로 화려한 프레스코가 인상적인 대리석 홀이 있다.
벨베데레는 '좋은 전망', '전망대'를 일컫는 이탈리아어로 상궁에서 바라보는 빈의 거리 전망은 매력적이다.
 
공식 홈페이지 : http://www.belvedere.at/
교통 : 트램D Scholoβ Belvedere역
개관 : 겨울 09:00~17:00, 여름 10:00~18:00
휴관 : 월요일
입장료 : 일반 7.5유로, 학생 및 노인 5유로, 가족 티켓 15유로
 

Johann Baptist Reiter,
A Slumbering Woman, 1849
 
Rudolf von Alt
Der Stephansdom vom Stock im Eisenplatz, 1832
(실제 슈테판 성당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져서 당황스러웠다.)
 
Franz Eybl
Lesendes Madchen, 1850
 
Anton Romako
Tegetthoff at the naval battle of Lissa, 1881
 
Anton Romako
A Girl Picking Roses, 1883
 
Hans Makart
the five senses, 1872~1879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림!)
 
Adolf Hiremy Hirschl
Die Seelen des Acheron, 1891
 
giovanni segantini
The evil mothers, 1894
 
 
참고 :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 출처 www.artmbc.com )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과 장식성.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화폭에 담겨진 화려함에 금새 매혹되고 만다.
세기말과 세기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이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화가였다.
후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 화가가 뭉크라면 구스타브 클림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상징주의는 모더니즘의 선구이자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 문명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리고 클림트의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클림트는 스물 한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될 무렵이었다.
이 때부터 그의 작품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며 관객들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1891년부터 1910년까지의 10여 년 동안 그의 작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며,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작품에서 보이는 부분 부분의 양상이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평면적인 면으로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1897년 비엔나 분리파가 형성되고 그가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국제적인 평판을 얻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을 불사하는 여인들.
클림트는 여성들이 발휘하게 될 엄청난 힘을 미리 예견하면서, 작품 속에서 남성의 파경을 그렸던 것이다.
하지만 클림트는 외설과 퇴폐적인 요소로 당대의 전통 화단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빈 대학의 천장화가 많은 논란이 되었지만, 그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그려 나갔다.
이후 보수적인 미술 집단이었던 ‘쿤스틀러하우스 Kunstler-haus(미술가의 집)'의 회원이었던 클림트는
그 동안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어져 왔던 작품들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898년에 비엔나 분리파를 주도적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분리파의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이룩하는 것에 있었다.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의존하지 않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4년 클림트에게는 빈 대학교의 강당의 천장을 장식할 작품의 제작을 의뢰 받았다.
하지만 벽화가 제작되자 그의 작품에 대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 결과 <철학>이라는 작품을 공개했을 때 클림트에 대한 동조자와 반대자들의 논쟁은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곳곳에 등장하는 나체의 인물들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의 그림들은 곧 추악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성의 위대한 힘을 찬양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작품 속의 인간들은 혼돈에 휩싸인 채 뒤엉켜 있었다.
이 사건으로 클림트는 복고주의적인 반동에 부딪치며 소외를 당했다.
하지만 <법학>을 통해 클림트는 그의 분노를 마음껏 터뜨렸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남자의 모습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암시한다.
세기말적인 음산한 분위기는 이후 <의학>에서도 이어지며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은 섬뜩할 정도로 관객들의 심장을 자극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의 화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풍부한 장식성에 있다.
당시 도형미술을 비롯한 의복, 건축 등 모든 분야를 휩쓸며 유행했던 정사각형은 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클림트 역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중요한 화면상의 규칙이 바로 정사각형이었다.
클림트는 정사각형 속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넣는 일 뿐만 아니라,
정사각형 자체의 이미지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시도하기도 했다.
황금색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구성.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 같은 장식성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클림트가 미술교육을 받았던 응용미술학교의 자연스러운 영향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의 유행하던 미술사조인 아르누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클림트의 작품에서는 자연스러운 공간성의 파괴를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범하게 된 오류였다.
장식성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림트는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서 발산하는 창조적인 힘은 지극히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참고 : 구스타브 클림트(출처 싸이월드 클럽 klimt-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클림트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알려진 내용들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그 진위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류의 신비감이 우리를 클림트에게 이토록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비엔나 교외의 바움가르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곱명의 아이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금세공업자였던 아버지가 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했던 클림트는
14살이 되던 해에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 두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림에 대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특별하고도 위험스런 장난에서 시작되었다.
(정치 현실을 비난하는 그림을 담벼락에 그려서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
그 사건을 계기로 그의 예술적인 재능이 조금씩 인정받게 되었고
비엔나의 국립응용미술학교인 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함으로써 직업적인 화가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그림의 소재로써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관심갖을 만한 대상이 못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사회로부터 고립되기를 원했다.
그가 관심갖은 대상은 오직 여성뿐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의 초상화를 남겼지만 정작 자신의 초상화는 하나도 남기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삶과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했으며
보통 화가들과는 달리 작업 공간과 생활 공간을 명확히 구분했다는 점에서도 철저히 고립되고자 했던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화가로서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조롱과 야유가 섞인 비판도 서슴지 않는 강인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당시 미술계의 주류를 이끌었던 미술가협회의 오랜 전통에 도전하여 외국의 새로운 미술 경향들을 소개하고
젊은 작가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분리파(Secession)를 설립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편 것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일생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많은 여성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의 몰락은 여자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성학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그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도록 예술적인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은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의 만성적인 정신 질환과 가족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모성과 사랑 그리고 가족애에 대한 절실한 갈망을 낳게했다.
특히 가족의 죽음은 그의 작품 세계에 있어서 색채와 주제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영원히 반복될 삶에 대해서 좀 더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된다.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의 성숙하지 못한 애정관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
2명이나 되는 그의 아이를 낳았고 한때는 적극적인 구애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결코 결혼할 수 없었던 여인 미치 침머만과
사회적으로 폭넓은 경제 활동을 하면서 그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사업적인 동반자로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그의 여인이었던 에밀 플로게, 그녀 역시 결혼하지 않은 대상이었다.
말년에 그는 손가락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작품 활동보다는 의상디자이너로서 활동하가다 자신의 욕실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완성되지 않은 많은 작품과 그가 CIA에 의해서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는 그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을 남겨둔채로...

참고 : 아르누보(출처 www.artmbc.com에 부분 추가)
클림트의 장식성은 19세기 말에 유행했던 양식인 ‘아르누보'에서 기인한다.
아르누보란 불어로 ‘새로운 예술'이란 뜻으로 19세기 말 영국에서 모태가 된 미술 운동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 및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 양식이며,
 원어명 art nouveau '아르누보'는 영국·미국에서의 호칭, 독일에서는 '유겐트 양식(Jugendstil)',
프랑스에서는 '기마르양식(Style Guimard)',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Stile Liberty)'으로 불린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기술 발전으로 미술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었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이 파괴되었다고 자각한 예술가들은 수공예와 중세 장인 세계를 동경하며 미술과 공예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누보가 발생하게 된 기틀이 되었다.
종래의 건축·공예가 그 전형(典型)을 그리스, 로마 또는 고딕에서 구한 데 반해
이들은 모든 역사적인 양식을 부정하고 자연 형태에서 모티프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다.
특히, 덩굴풀이나 담쟁이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선과,
파상(波狀)·곡선·당초무늬[唐草文] 또는 화염(火焰)무늬 형태, 공작의 형태,
파도나 포도덩쿨의 줄기, 백조, 꽃봉오리 등이 그것이다.
원래 건축이나 공예품, 그리고 조각 등의 장식 미술에 접목했는데,
점차 모든 미술 분야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전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클림트는 <키스>를 통해 남녀의 얼굴을 그린 후 자유롭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장식했다.
이처럼 다이내믹한 선이 아르누보의 가장 대표적인 성격이다.
이것은 동물이나 식물 등 자연의 곡선을 본뜬 것으로,
이런 선을 표현함으로써 감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을 환기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건축과 디자인에서 발전된 아르누보는 몇몇의 화가들과 소묘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대표적인 아르느보 건축가로는 가우디와 오르타를 들 수 있고,
영국의 화가 오브리 비어즐리는 흰색 바탕 위에 검은 색으로 에로틱하고 불길한 이미지를 그려냈다.
또한 로트렉의 작품에 나타난 들쭉날쭉한 형태와 과장 섞인 표현법 역시 아르누보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클림트는 당시 유행하던 양식을 응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법을 보여주며 정교한 장식성으로 아르누보를 발전시켜 나갔다.
 
 

Gustav Klimt
Sonja knips, 1898
 
Gustav Klimt
The Kiss, 1907~1908
 
Gustav Klimt
Adele Bloch-Bauer, 1907
 

Gustav Klimt
Judith I, 1901
 
Gustav Klimt
Adam and Eve, 1917~1918
 

참고 : 이곤 쉴레(출처 싸이월드 클럽 klimt-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오스트리아의 화가.
1890년 툴린에서 태어나 1918년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1906년 부터 1909년까지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한다.
여기서 만난 구스타브 클림트는 그의 숭배의 대상이었을뿐 아니라
쉴레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쉴레는 전통적 회화 방식을 포기하고
아르 누보와 유사한 장식성이 강한 화풍으로 기운다.
여러 곳으로 이동하며 살다가 1912년 다시 비엔나에 정착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며, 이곳에서 미술품 수집가와
메세나의 지원을 받아 비엔나 표현주의의 주요인물로 부상한다.
뛰어난 데생을 구사하는 쉴레의 작품은 대부분 연필, 수채, 과슈를
매체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윤곽선은 날카로우며 관능적이다.
그는 인체의 성적 부분이나 시체와 같이 묘사된 육체, 복잡하게뒤엉킨 몸체등을 묘사하는 데 역점을 둔다.
그가 많이 그린 누드화는 몹시 불순하면서도
선동적인 에로티즘을 보여주고 있으며,
1912년에는 이 사실 때문에 경찰에 검거되는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또한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종종 이중 자화상을
그린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그 자신의 실체에 대한 지신의 방황,
죽음과 섹스 앞에서 느끼는 혼란을 거의 병적이라 할 만한 강박관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 고흐에 매료되었던 그는 1913년에 자기도 자신이 살던
노이랑겐바하의 누추한 방을 그리기도 한다.
그의 풍경화 또한 고통스럽고 갈갈이 찢긴 자연을 묘사하고 있다.
1915년 결혼을 함으로써 조금 평화로워진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쉴레는
1918년 유럽을 휩쓴 스페인 감기에 걸려 임신중이던 부인과 함께 사망했다.
28살이라는 나이에 너무 일찍 찾아온 죽음으로 인해 그의 작품세계는 미완성으로 남게 된 것이다
 

Egon Schiele
Mother With Two Children, 1915~1917
 
Egon Schiele
Death and Girl, 1915
 
(나는 쉴레의 그림이 이토록 애처롭고 여리고 아픈 줄 처음 알았다.
음...생각을 정리하기엔 시간이 걸릴듯...)
 
 
 
**모든 그림은 구글 선생님으로부터 얻어온 것. 아주 작은 그림들은 벨베데레 공식 홈피에서 퍼온 것.
(죄송합니다;;)

2005/09/05 19:44 2005/09/05 19:44

Trackback Address >> http://wedding.makeself.net/trackback/383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우울한 숙소에서 일어나 찬물만 가득한 샤워를 하고 우울한 아침 식사를 했다.
으아...여긴 시설도 최악이다.
남자용 샤워실 고장이라고 달랑 두 개인 여자 샤워실을 모두가 이용했다.
수압도 엄청 약해서 여기저기 물 쓰면 샤워 중에 물이 안나온다.
아침 식사는 또 어떠한가.
어제 아침에도 봤던 야채 볶음이 뚜껑도 안덮힌 채 내내 싱크대에 있더니 오늘 아침에 또 나왔다.
어제 돈 더 내고 '호텔팩'으로 불고기를 먹었던 사람들은 이 야채에 고기만 넣은걸 먹은거였다.
너무하다.
끔찍한 오이 반찬, 나물, 김치가 아주 작은 종지에 나온 것이 반찬의 전부였다.
오로지 밥과 국만 많이 먹으란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
휴우...그래도 밥인지라 한 그릇 억지로 먹고 나왔다.

스위스부터 넷이던 일행은 이제 완전히 둘씩 갈라져 나와 세연씨는 다시 오붓하게 다니게 되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묘지.


전부터 외국의 묘지를 가고 싶었던 터라 감동도 컸다.
고요하고 아름답고 엄숙했다.
죽은 자의 집이라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은 우리나라와 같았지만 더 아름답고 더 편안했다.
(죽음과 죽은 자를 대하는 우리네와 그들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음악가의 무덤이 모인 곳에서 베토벤, 모짜르트, 슈베르트, 요한 스트라우스 가족, 브람스의 무덤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자그마했지만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일찍 떠나버린 그들, 너무 늦게 태어난 나...음악으로만 그들을 대할 수 있다니 많이 아쉽다.

환전을 위해 아멕스로 갔지만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이제는 제 집 다니듯 길 찾아가는 우리는 어슬렁어슬렁 클림트를 만나러 갔다.


클림트!
내가 사랑하는 화가!
벨베데레 궁에 걸린 클림트의 'KISS'를 본 순간!!!
주위는 온통 까맣게 되고 나는 그만 울컥했다.
너무나 눈부시고 아름답고 아름답다! 아름답다!
온통 황금빛 찬란한 그림을 직접 보다니!
죽기 전에 한 번만 봤으면 좋겠다는 클림트의 그림을 28살 시작에 보았다.
아름다웠다!
끔찍하게 아름다웠고 강렬했고 매혹적이었다.
나는 그만 정신을 놓고 쓰러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벨베데레 궁, 클림트와 쉴레에 대해서는 다음 편을 참고)

결국 클림트 엽서를 구입했다.
세연씨에겐 미안했지만 절대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눈누난나~ 신나하며 벨베데레 궁을 나와 계속 걸었다.
오늘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요한 스트라우스 공연이다.
시간이 엄청 많이 남아 핫초콜렛도 마시고 라면과 스시도 먹었지만 여전히 시간이 남았다.


미리 공연장에 가볼까 하여 왔떠니 기다릴만한 장소가 없었다.
2시간이나 남았는데 서서 시다릴거냐고, 황당하다는듯 묻는 직원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하여 이곳 카페에 왔다.
처음으로 마신 에스프레소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다.
빈에서 아인슈페너를 못마셔서 아쉽지만 맛은 그냥 그렇다고 하니 이 정도로 O.K.
공연장 입장하려면 1시간 남았네...편안하다...

참고 : 아인슈페너(Eispaenner)
우리가 흔히 부르는 비엔나 커피.
커피에 휘핑 크림을 얹은 것으로, 빈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엔나 커피로 불리나 보다.
마셔본 사람들의 말론 특별히 맛나진 않단다.


이브닝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심하고 들어갔더니 직원이 우리의 복장에 당황한다.
왜! 어때서! 단정하구만!
그래도 A석답게 좋은 자리로 배치받았다.
공연장의 모습은 익히 알던 어둡고 답답한 모습이 아니라 화려한 샹들리에로 불을 밝힌 실내에 객석과 마주한 무대가 코앞인 아담한 모습이다.
예전에 TV에서 이런 식의 공연장을 돌며 연주하는 음악가들에 대해 나온걸 봤는데, 관객과 하나되는 모습에 한 번쯤 가 보고 싶었다.
오늘 바로 그러한 공연장에 오게 되어 내심 기쁘고 설레였다.

최소의 인원으로 구성된 연주단은 친숙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현악기의 미세한 마찰음까지 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음악이었기에 몹시 감동했다.
게다가 연주단 바로 앞 작은 공간은 또 다른 무대가 되어 왈츠를 추는 댄서들과 오페라를 부르는 가수들의 자리가 되었다.
단순히 듣는 음악회가 아니라 춤과 노래와 연기가 범벅이 되어 나는 아찔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연주단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휘파람, 노래 실력도 즐거움을 더했지만 내내 미소짓는 표정을 직접 보니 그저 그들이 아름다웠다.
무엇하나 개성없다고 툴툴거리게 했던 오스트리아는 눈이 아니라 귀로 느껴야 했던 나라다.
아...진정 오스트리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내내 왈츠의 선율과 춤이 머리에 남아 창피함도 모르고 흥얼거리며 춤을 흉내내었다.
길고 긴 여운을 주는 값진 경험이었다.


우울한 숙소로 돌아왔지만 전혀 우울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 아침 떠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체코에선 어떤 감동을 받게 될까.
여행 내내 감동이 끊이지 않는다.
으아...실로 어마어마한 문화 충격이다.

이제 자야지.
오늘은 여자 도미토리에 나뿐이다.
12시가 다 되었는데 왜 다들 안오지, 자다가 깨는건 싫은데.,,
그래도 내일을 위해 억지로라도 자자. 후아~
(알고보니 이곳에서 한 번 잔 사람들은 바로 나가버렸다;;)


참고 : 알아두면 유용할지도 모를 가격 정보.
메트로 24시간권 1인당 5유로
요한 스트라우스 실내악 1인당 35유로
벨베데레 궁전 입장권 1인당 7.5유로
에스프레소 한 잔 1.8유로

 
작성자 : toytreesp
작성일 : 20050905
2005/09/05 19:25 2005/09/05 19:25

Trackback Address >> http://wedding.makeself.net/trackback/382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